밀양의 인물 조선시대 변계량(卞季良),고려시대 박위

03/09/2021

조선시대 변계량(卞季良)

변계량은 조선 3대 태종, 4대 세종 때 명신이다. 그리고 워낙 유명 인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한 것이다.변계량이라 하면 조선시대 외교문서 작성에 제일가는 명 문장가였다고 전해오기도 하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세종대왕 때 있은 일이다.

중국에서 흰 꿩을 선물 받았는데 이에 조선에서는 감사하는 글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글을 변계량이 작성하는데 그 글에서 <이에> <여기에>라는 뜻의 한자 자(玆)를 통상적인 예로 윗 구절에 붙여서 쓰지 않고 띄어서 중간에 두는 글을 썼다. 이것을 본 대신들과 왕은 왜 이런 문장을 갖췄는가 물었다. 옳지 않는 글이라고 책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변계량은 답하기를 「밭가는 일은 당연히 종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고, 베 짜는 일은 여자종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므로 소인이 외교문서를 맡아 있으니 마땅히 소인이 알아서 작성하는 것인데 함부로 잘못되었다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은 그가 관례를 깨고 앞 구절에다만 붙여 문장 구성을 한 것은 짐짓 중국대국의 호감을 싸기 위하여 특별히 중국을 지칭하는 데서 글자를 띄어 썼던 것이다. 우리가 한자 글자의 문장에서 뜻을 풀이하기가 어렵게 여러 글자가 모두 붙여 쓰여 있는 것을 본다. 글자 한자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변계량은 문장 구성에서 해석에 혼돈이 없게 특별한 문장구성을 하여 해설에 차이가 없도록 하였다.

변계량은 고려 말기 우왕(禑王)때 과거급제를 하고 벼슬길에 올라 조선이 개국하고 난 후 3대 태종 때는 오늘날 비서 자리와 같은 지신사(知申事) 관직에 있었고 세종대왕 때는 문사(文士)들만이 재직하는 대제학(大提學)의 관직에 무려 20여 년 동안 있기도 하였다. 그만큼 그는 문재(文材)가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태종은 변계량의 시재(詩材)를 알아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가까이 두며 친구처럼 대하였다.이러한 변계량에게 탐탁지 않은 평가도 있었는데 조선 중기의 문사 성현(成俔)의 글을 모운 문집인 <용재총화>의 내용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는 것을 본다.

「공의 성품이 인색하여 변변치 않은 물건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아니하고 동과(冬瓜)를 잘라 먹은 뒤에 그 자른 자리에 표를 해 두었고 손님을 대하여 술을 마실 때는 잔 수를 계산하고 남은 술병을 단단히 봉해 두었다. 이래서 손님들은 그 인색함이 대단하였다고 하였다. 세종대왕이 흥덕사 절에서 국조보감을 하고 있던 그에게 음식을 하사했는데 이에 따라 대신들도 그에게 다투어 술과 음식을 보냈다. 그런데 공은 그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방안에 쌓아 두었으며 그것이 날짜가 오래 되도록 두는바람에 구더기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썩으면 구드기 때문에 내버리게 되는데 하인한테 한 점도 주지 않았다」 변계량의 인색함을 여실히 알게 하는 대목인 것이다.

변계량의 호는 춘정(春亭)이다. 사후 나라에서 시호를 받았다. 문숙공(文肅公)이란 시호이다. 시호는 유명 인물에게 나라에서 특별히 내리는 호인 것이다. 시호를 지어 줄 때 그 인물의 생전 행적에 걸맞는 내용을 찾아 짓는 것이다.

변계량은 14세에 고려의 거유 목은 이색의 제자로 있었으면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에게는 역시 문재가 뛰어 난 형이 있었다.

변중량(卞仲良)으로 역시 고려조에 과거 급제를 하고 조선에 와서는 승정원(承政院)의 우부승지(右副承旨)벼슬을 하였다. 정3품의 관직으로 참판의 벼슬아래이다. 변중량은 이성계(조선태조)의 배다른 형인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였다

고려시대 박위

고려사 열전에 보면 밀양인 박위(朴葦)에 관한 기사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조선지리서)에서도 박위에 대한 언급 기사가 있었는데 그는 고려 32대 우황(1374-1388)때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어 왔다가 왜군 침입을 받아 황산강(黃山江)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29명이나 죽였다.

당시 왜군은 배 50여 척을 가지고 김해 남포(南浦)에 와 <우리는 바람을 이용하여 황산강을 쉽사리 거슬러 올라가서 바로 밀성(밀양)을 치겠다>하는 팻말을 세워 그들 군사에게 알리기도 하였는데 박위는 그 사실을 정찰해서 알아 양쪽 강가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놓은 다음 병선 30척으로 그 왜군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둔 일이 있었다.

박위의 지혜로운 공격으로 승리의 보고가 조정에 전해지자 왕은 후하게 상을 내리고 훗날 그에게 경상도 순문사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러한 박위는 무공(武功)이 많았다. 이성계가 요동반도정벌에 나섰을 때 함께 따라 갔다가 정벌을 취소하고 되돌아 온 회군(回軍)사건이 있을 때는 그도 역시 이성계의 편에 서서 명(明)나라 공격을 그만두고 되돌아 오고 말았던 것이다.

명나라를 치자는 최영장군(崔瑩將軍)의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으로 당시 고려 조정은 숭명(崇明)또는 친명(親明)의 신하들과 반명(反明)의 신하들 간 알력이 많았다. 저마다 그 이유가 있었는데 박위는 신흥세력으로 일어나는 친명파가 되었다.

당시 황산강은 오늘날 어느 쪽 강인지 고증해 볼 필요가 있었는데 낙동강과 연결되는 남천강 하류가 아닌가 한다. 박위는 무인이었다. 그는 대마도의 왜인을 칠 때 왜군 선박 3백 척과 그 근방 집들을 불살라 폐허화시킨 명장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성계와 가까이 지내면서 고려말 임금 공양왕(이성계가 세운 형식적인 왕) 때 공신록에 오르고 충의군(忠義君)이란 군호를 제수 받았다. 왕으로부터 받은 교서(敎書)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는 관대한 도량과 활달한 자질로 때를 만나 재능을 펴서 공무에 몸 바쳤으며 그 일이 민활하였다. 웃사람을 보위하는 충성심이 강하여 선대 공민왕께서도 칭찬하였다. 네 차례나 수령을 지내고 세 번에 걸쳐 남도에서 군사일을 보았고 그로인해 왜적을 물러가게 하여 백성들은 안심하였으니 가히 재능은 관우 장비 위에 있었음이라~ 이하생략~>

이런 과찬의 기록이 있는 박위였다. 그가 무인이지만 문신들이 주로 제수 받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란 지위까지 올랐다.

이 벼슬은 판서(判書) 다음의 자리로 조선시대 참판 벼슬과 같은 것이다. 벼슬품계로는 종2품이다. 영의정이면 정1품의 벼슬인 것이다.

*출처|빨때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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