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서원

26/08/2021

밀양 예림서원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조선 시대 사림의 우두머리였던 김종직金宗直(1431~1492·호는 점필재佔畢齋)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 밀양부사 이경우李敬祐가 세웠다. 서원은 선현의 가르침을 본받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학생을 가르치던 조선 시대의 지방 사립학교를 말한다."

 

예림서원은 1567년 명종 때 창건돼 덕성서원德城書院으로 불리다가 퇴계 이황이 김종직을 추앙해 점필서원佔畢書院으로 친필의 편액을 올렸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37년 부남면 운례리(현재의 상남면 예림리)로 옮기면서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종 때인 1670년 사액서원賜額書院(임금이 이름을 지어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이 되면서 나라의 지원을 받아 지방 교육과 선현 매향을 담당해 왔다. 1680년 화재로 전소돼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으며, 고종 때인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건물이 하나둘 복구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김종직은 밀양 출신으로 문장과 경술이 뛰어난 성리학의 대가로 영남학파의 증조로 통한다. 길재와 정몽주의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 사림파의 영수로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김굉필·정여창 등이 훗날 조선의 학문과 정치를 이끄는 사림파의 주축으로 컸다. 김종직은 세조 성종 때 여러 관직을 재임했는데 특히 함양군수로 있을 때 관내의 정자에 유자광의 시가 걸린 것을 발견하고 불태워 버리자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주모한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복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김종직이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화를 입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육 영역을 앞에, 제례 영역을 뒤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 배치 양식을 따라 강당인 구영당求盈堂이 앞에 있고 사당인 육덕사育德詞가 뒤에 있다. 독서루頭書樓 아래 삼문은 정문이고 2층 누

대樓臺는 유생들이 쉬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다. 돈선재敦善齋와 직방재直方齋는 기숙사이며 장판각蔵板間은 김종직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만든 책판을 보관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점필재 문집

예림서원에는 <점필재 문집佔畢齋文集> 책판과 <이존록彝尊錄>이 보관돼 있다. 점필재 문집 책판은 김종직의 시문집을 펴내려고 만든 책판冊板을 이른다.

<이존록>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의 행적을 담은 책으로 한 사대부 가문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사료다.


<점필재 문집>은 김종직이 죽은 다음 해 제자 조위가 편집해 원고를 만들었고 5년 뒤인 1498년 초간본이 나왔으나 그해 무오사화가 일어나 없어지고 말았다.

중종 때인 1517년 제자이자 조카인 강중진이 남아 있던 원고를 다시 모아 선산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점필재 문집>은 시집 23권·문집 2권 등 모두 25권이며, 연보와 문인록 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예림서원에 보관 중인 책판은 선산에서 만들어진 것을 1789년 옮겨온 것이다.

<이존록>은 1497년 간행됐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예림서원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 보관돼 있다. <점필재 문집> 책판 및 <이존록>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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